고베 시립 청소년과학관을 방문한 과학교사들이 유전자 구조를 설명한 모형과 퍼즐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제공〓두산연강재단]
“한국 학생들은 좋은 대학 들어가려고 고생이 많다면서요?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한국보다야 덜할 테지만….”
지난달 22일 고베 시립 청소년과학관에서 만난 한 할머니 자원봉사자는 “일본도 고교 2·3학년이 되면 학원을 많이 다닌다”며 이렇게 말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할머니 자원봉사자가 “아이들이 잘 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거들었다. 우리에겐 단 1명도 없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무려 22명이나 배출한 과학기술 강국, 일본을 보러 왔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하루 전날 방문한 오사카 부립고즈고등학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고즈고는 한국 과학중점학교와 비슷한 ‘슈퍼 사이언스 하이스쿨(SSH)’로 선정된 학교로, 오사카부 10대 고교에 꼽힌다. 꽤 수준 높은 학교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학교 무라타 도루 교장은 “올 초 한국 과학고를 방문했는데, 높은 수준을 보고 놀랐다”며 오히려 한국 교육 시스템을 부러워했다. 생물을 담당하고 있는 한 교사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가장 큰 목적은 대입”이라며 “입시 위주 교육이라는 문제점은 일본에서도 고민거리”라고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국 중국 일본 교육 시스템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일갈한 나카무라 슈지 미국 UCSB 교수 발언이 떠올랐다. 그는 청색 LED를 개발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지만 한참 전에 연구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반발해 일본 국적을 포기한 사람이다.
세계적 석학이 내린 진단이 이러할진대 진정 아시아 교육 시스템에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지난달 20~25일 5박6일 일정으로 일본 오사카, 고베, 교토 등지에 있는 과학·교육시설을 둘러본 한국 교사들도 ‘우리와 크게 다를 것도 없네’ 하며 처음엔 좀 헷갈렸을 것 같다.
이들은 2014년 ‘올해의 과학교사상’을 수상한 과학·수학교사 38명. 올해의 과학교사상은 창의적 과학·수학 교육으로 학생들 학업성취도를 높인 전국 우수 교사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미래창조과학부, 매일경제신문, 한국과학창의재단이 공동 주최한다. 수상 교사들에게는 외국연수 기회를 부여하는데, 후원기관인 두산연강재단이 매년 지원한다. 올해가 9회째다. 교사들은 일본 간사이 지역 주요 과학관과 고교를 견학했다. 또 1875년 창업해 세계적 계측·의료기기 전문기업으로 성장한 시마즈제작소,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가 창업한 교세라 등 기업도 방문했다.
교사들은 나쁘게 말하면 고집, 좋게 표현하면 전통을 고수하는 모습에서 기초와 원리를 중시하는 일본의 과학 경쟁력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박성혜 옥계동부중 교사는 “헐렁헐렁하고 시커먼 교복을 입고 다니는 학생들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변태진 한성과학고 교사는 “괄호가 있는 프린트물 수업을 보며 아직도 전통적 학습법을 중시한다는 것을 느꼈다”며 “좋다 나쁘다 할 게 아니라 한 우물을 고집스럽게 파는 점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고즈고 1학년 수학 수업 시간도 그 연장선상이다. 교사가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돈 학생을 중심으로 나머지 학생들이 빙 둘러 서는 모양을 지적하며 “잘 봤지? 한 점을 중심으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 이게 바로 원이다”라고 말했다. 김영관 제주시교육지원청 장학사는 “다소 유치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단순한 퍼포먼스로 학생들은 원의 개념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성현 부산 삼락중 교사는 “일본에서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연역적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게 특징으로 보인다”며 “실험을 해서 다른 결과가 나오면 원인을 찾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는 태도는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했다. 유병춘 충남기계공고 교사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창의적 교육이 구현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5박6일 연수 동행 박용현 연강재단 이사장
"뿌리깊은 日기초과학 여전히 배울점 많아"
“일본이나 한국이나 똑같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의 기초는 다릅니다. 기초과학기술에 투자한 지 100년이 넘었어요. 한국은 5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이 간극이 간단하게 메워질 거라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큰 착각입니다.”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은 “과거 짝퉁을 만들던 한국이 조선, 전자 등과 같은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자 바로 중국의 추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기술력은 아직도 저 멀리 있다”며 “일본은 기초와 원리를 중시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일본 국가 경쟁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지만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과학기술력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배워야 할 게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연수에 참가하는 선생님들께 과학·수학 교육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화, 시민의식 등을 눈여겨봐 달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라고 강조했다.
박 이사장은 2007년 수학·과학 우수교사 일본 연수를 시작한 이후 매년 이 프로그램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5박6일 전 과정을 같이한다. 함께 이코노미석에 올라 옆자리 교사와 대화를 나누고, 버스에서 유쾌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주도한다. 참가한 교사들 전원과 돌아가며 밥을 먹고 함께 사진도 찍으며 한국 과학교육 현장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한다.
매년 비슷하게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라 질릴 법도 한데, 그는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늘 재미있다”며 밝게 웃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일본 연수에 참가하는 수학·과학 교사 수를 2배 이상 늘리고 싶다”고도 했다.
교사들은 “요즘 때아닌 갑을 논란이 일고 있는데 정말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의 솔선수범)’를 보는 것 같다”며 한마디씩 했다. 한 교사는 “이런 오너가(家)가 이끄는 기업이라면 마음 놓고 아이들을 보낼 수 있다”며 “학생들에게 (두산그룹이 인수한) 중앙대 진학을 더 많이 권유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국력은 과학기술에서 나온다. 과학과 수학 선생님들이 우리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 우리나라가 그만큼 더 발전할 수 있다”며 “짧은 기간이지만 선생님들이 많은 것을 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사카 = 최용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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